변화의 중심에 서서

변화의 중심에 서서

나는 요즈음 청년작가라고 자처합니다. 언제나 과거의 작품들과 결별하겠다는 생각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무기의 그늘’을 출간한 이래 15년 동안 절필하고 사회 봉사와 망명 투옥 등으로 보냈기 때문이지요. 본격적으로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이 감옥에서 나온 뒤 부터이니까 나는 1998년에 문단에 나온 젊은 작가인 셈입니다.
1989년 11월, 내가 망명하고 있었던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에 서서, 앞으로의 내 문학적 기획들을 바꾸겠다고 작정했고, 그것을 실현하는데 십년이 걸렸던 셈이지요. 당시의 메모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은 보다 과감하게 보다 풍부한 형식으로 해체 시켜서 재구성해야 한다. 삶은 놓친 시간과 그 흔적들의 축적이며 그것이 역사에 끼어들기도 하고 꿈처럼 일상 속에 흘러가 버리기도 한다. 역사와 개인의 꿈 같은 일상이 함께 현실 속에서 연결 되어야 한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서도 안되고, 화자는 어느 누군가의 관점이나 인칭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시각에 따라 서로를 교차하여 그려서 현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한 인물과 사건을 두고도 모든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생각과 시각의 다양성으로 자수를 놓듯이 그릴 수는 없을까. 객관적인 서술방법도 삶을 그럴싸하게 그린다고 할뿐이지 삶을 현실의 상태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다. 삶이 산문에 의하여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삶의 흐름에 가깝게 산문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나의 형식에 관한 고민이다.

감옥에서 석방된 뒤에 처음 썼던 ‘오래된 정원’은 내가 과거에 사용하던 리얼리즘의 서술 방식을 버리고 인칭과 시제를 넘나드는 일종의 산문의 해체를 시도했던 작품입니다. 사실 ‘오래된 정원’이란 제목은 유토피아에 대한 패러독스인 셈이지요. 나는 이 제목을 동양의 오랜 전설인 어느 골짜기의 아름다운 화원이 있는 숨겨진 나라나 꿈 같은 섬나라의 설화에서 가져왔습니다. 나는 망명지 베를린에서 변화되는 세계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속삭였습니다. “이제 혁명은 끝났다”라고.
내가 감옥에서 나올 무렵에 부유층 구역의 백화점이 무너졌지요. 이것은 한국식 개발독재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뒤이어 IMF가 개입하는 금융 대란이 일어났습니다. 생태계는 더욱 무참하게 파괴되어 가고, 새로운 세기에도 종교와 인종에 따른 국지전과 내란이 일어났고, 테러와 반테러를 명분으로한 패권적 전쟁은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이른바 주변부 세계는 아직도 내란과 독재, 저항과 좌절을 차례로 겪으면서 다시 전쟁과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독주하게 되면서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불안한 종말의 징후를 보이며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더구나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남한 군사독재에 항거한 세대는 민주화를 이루어내기는 하였지만, 정작 그 싸움의 주체들은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지난 날의 열정과 변화된 현실 속의 일상 사이에서 몸과 마음이 찢어지는 분열을 어떤 형태로든 겪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체의 위기는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찾아온 이념의 소멸과 더불어 잃어버린 것들을 되씹는 과정에서 더욱 심화 되었습니다.

‘오래된 정원’은 ‘시제가 맞지않는 사랑과 역사’에 대한 서술입니다. 이 작품이 두 남녀의 분리된 삶을 다룬 연애소설의 형태를 띄었던 것은 위와 같은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각기 스스로의 내면을 진술하는 ‘혼잣말’로 세월을 이야기합니다. 이야기의 유기적 통합을 간섭하고 끊어버리는 각자의 내면 세계가 현실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넘나듭니다. 우선 연대기적 시간대로 본다면 앞뒤로 연결되어야 할 서술의 두 축이 제각기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남자와 여자의 일인칭 시점 안에 머물면서 끝까지 평행선을 이룹니다. 그것은 물론 여자의 기록으로 재현되는 18년의 세월 동안 남자가 감옥 안에 있었고, 발신자의 사후에야 접수된 편지와 일기들을 통해서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시공간적 격리와 단절의 다른 표현이었지요. 각자의 시간대가 다른 1인칭 서술은 소설 안에서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독자가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3인칭적 시각이 완성되고 이들의 사랑을 독자의 읽는 행위를 통해서 완성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엇갈린 시간들을 ‘지금 여기’에서 연결하는 것은 독자의 읽는 행위에 의하여 가능해집니다. 서술 형식의 서로 만날 수 없는 내적 제약은 감옥에서의 남자의 체험과 바깥 세상에서 겪었던 여자의 씁쓸한 삶의 과정이 서로 따로 읽히면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 분열의 갈등은 변혁운동의 주체가 이제는 냉정히 승인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좌절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인간을 살아있게 해주는 역사적 진실의 진전은 언제나 지상의 시간 제약 때문에 의미가 부여된 기호들과는 따로 떨어져서 뒤늦게 체험되지요. 각자의 운명을 감당해야 하는 개인과 그들의 삶으로 육화되는 과정을 염두에 두지않는 모든 진보적 기획은 시간 차에 의해서 일그러지고 맙니다. 깨달음은 뒤늦게 오지요. 그러나 지상의 무상한 시간을 견디고서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는’ 것들을 알아보는 그 기억의 힘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래된 정원‘은 내가 20세기와 결별하면서 다시 쓰게된 첫 번째 작품이었고, 작가로 되살아나면서 독방 후유증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게 도와 주었습니다.

‘손님’은 한국전쟁 50주년이던 2000년에 쓰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을 출간한 직후에 세계를 강타한 9.11 테러의 역풍으로 북한이 이른바 ‘악의 축’으로 지목되고 전쟁의 위협마저 가해진 것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완성 되었던 냉전체제의 와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가 여전히 전쟁의 취약한 고리로 묶여 있음을 섬뜩하게 일깨워준 사건이었습니다.
나는 한국전쟁 중에 북한의 한 작은 군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천연두’를 서쪽에서 온 병으로 파악하고 막아내고자 했던 근세 조선 민중들이 그 병을 ‘손님’ 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무속의 한 형식을 만들어냈던 것에 착안해서 나는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을 주인의 반댓말인 ‘손님’으로 규정했습니다. ‘손님’은 저러한 악몽의 50여일을 드러내는 한판의 해원(解寃)굿입니다. 이 작품은 ‘황해도 진오귀 굿’ 12 마당을 기본 구성과 형식으로 취하여 썼습니다. 소설에서는 굿판에서처럼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등장하며 그들의 회상과 이야기도 제각각입니다. 굿에서는 이들을 연결하는 것이 샤먼이지만 소설에서는 작가 자신이 샤먼이 됩니다. 나는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이라는 하나의 씨줄과, 등장인물 각자의 서로 다른 삶의 입장과 체험을 통하여 사건을 프레스코화처럼 총체화하는 다중화자의 구전 담화라는 날줄을 서로 엮어서 한폭의 베를 짜듯 구성했습니다.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있는 전쟁의 상흔과 냉전의 유령들을 이 한판 굿으로 잠재우고 화해와 상생의 새 세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작자의 본뜻이기도 했지요.

2003년에 발표한 ‘심청, 연꽃의 길’ 역시 오래된 도교 설화로서 판소리라고 하는 우리 전통 모노 오페라로 공연되던 것을 내 방식의 이야기로 바꾼 것입니다. 나는 매춘과 근대적 시장을 중심으로 19세기 동아시아의 변화에 대하여 썼지요.
판소리 ‘심청가’에서 청이는 맹인 홀아비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드리려고 공양미 삼백 석을 받고 중국 난징 상인들에게 팔려갑니다. 그리고는 항해의 안전을 위하여 인신공양물로 제물이 되어 인당수에 빠져 죽지요. 나는 여기서 당시 사회제도를 떠받치고 있던 충효에 대한 미담을 걷어내기로 합니다. 그것은 봉건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며, 묘령의 소녀들을 이국 해변에서 거액의 재물로 사간 장사치들이 어떻게 처분했을지는 예나 지금이나 이윤을 다투는 세상사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지요. 나는 여러 가지 자료를 찾으며 해안을 거쳐서 나라 밖으로 나가는 고장에는 바다 멀리 팔려간 소녀들의 뒷얘기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리고 대개는 그녀들의 이름이 구전과 더불어 절집의 위패로 남아 있었습니다. 소녀들은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지요. 일본의 경우에는 더욱 사실적인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이들이 남한의 70년대 근대화 시기에 서울 공장으로 취직하러 올라가서 집에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도시 속으로 묻혀간 소녀들이나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기다리던 부모와 동생들은 송금이 끊긴 훨씬 뒤에도 돌아오지 않는 딸과 누이의 이름을 절에 올렸을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 근대의 표상은 자유무역과 시장의 확보로 표현됩니다. 근대적인 도시며 거리가 형성되었고 모든 나라의 노동 상품은 새로운 형태로 변해갔는데, 임금 노동과 매춘이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는 ‘심청’에서 이같은 흐름을 역사적 맥락으로 짚어가기 보다는 한 여자의 몸과 마음이 변전하는 과정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마치 연꽃 한 송이가 봉오리에서 새벽 이슬을 맞고 개화를 시작하고 햇볕과 비바람에 시달리며 지나는 행인을 만나고 보내기도 하면서 밤낮을 거쳐 계절을 보내는 과정과도 같이 썼지요. 그러므로 아편전쟁이나, 인도와 베트남과 동인도회사, 오키나와의 멸망,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민란, 청일전쟁 노일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 등의 과정을 멀리서 스쳐 지나가는 작은 우렛소리처럼 다루었습니다. 내가 힘을 기울이고 섭렵했던 자료들 거의가 그 시대 백성들의 일상을 다룬 것들이었고, 매춘과 남녀상열지사야말로 뒷골목 시정잡배들의 삶의 자상한 기록인 셈입니다.

‘심청’이 동아시아 전체를 떠돌다가 돌아올 즈음에야 과거에 무엇이 잘못 되었던가 하는 것들이 어렴풋한 안개 속에서 차츰 명료해집니다. 서구 열강이 눈 부릅뜨고 먹이를 찾아 동진하고 있었을 때에 동아시아의 봉건왕조들은 썩어서 붕괴 직전에 있었고, 이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한 위와 아래의 움직임은 어디서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개혁 의지는 하나 같이 실패했고, 동아시아는 아직도 사회실험의 와중에 있습니다.

2007년에 나온 ‘바리공주’ 역시 내가 감옥에서 나와 다시 창작을 시작하면서 밝힌대로 ‘내 방식대로 세계를 보겠다’는 것과 ‘세계의 현실을 동아시아적 형식에 담겠다’는 생각에 의해서 씌어진 작품입니다.

‘바리공주’는 ‘심청’에 뒤이어 이동과 조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앞의 것은 19세기의 줄거리요 다음 것은 바로 21세기 오늘의 일입니다. 19세기의 제국주의와 21세기의 신자유주의가 서로 연결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북한의 어린 소녀가 온 가족을 잃고 국경을 넘어 중국을 떠돌다가 바다를 건너 영국 런던에 이르러 무슬림 청년과 만나 가족이 되는 이야기가 줄거리입니다.

나는 이 줄거리를 ‘바리공주’라는 우리네 고대의 무속 신화의 형식과 구성에 담았습니다. 세계의 어느 신화나 민담에 보든지 현실에서 초현실로 넘어가는 줄거리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겪는 초현실이란 꿈도 마찬가지지만 현실을 근거로 한 메타포이거나 왜곡이지요. 현실의 그림자로서의 환상은 예술적 기법이 될뿐만 아니라 논리적인 것보다 더욱 깊이 있게 현실을 포착하게 해줍니다. 소설에는 부분적으로 내 꿈도 사용했는데요, 무격의 원조인 ‘바리 할미’가 나타나는 장면은 내가 빠리에서 집필하던 어느날 꿈에 본 형상을 그린 것입니다.

바리공주는 시베리아 북만주 그리고 한반도 전역에서 구송되어 오는데 현재까지 47종의 구술자료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 서사무가는 그리스의 오르페우스나 북유럽의 오딘 신화처럼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 저승을 다녀오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공주’는 죽을 병에 걸린 세상을 치유할 생명수를 구하려고 저승의 끝까지 찾아갈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지요. 무당들은 ‘바리’를 자신들의 원형신화로 여기고 바리 할미를 샤먼들의 무조(巫祖)로 밝히고 있는데, 바리 대목이 어째서 모든 굿의 한 과장으로 들어가야 했는지는 무당 자신들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짐작컨대는 무당이 자신들의 원조인 바리가 겪은 고통과 수난에 대한 줄거리를 구송함으로써 ‘고통 받은 고통의 치유사’ 또는 ‘수난 당한 수난의 해결사’임을 자처하려던 것 같습니다. 타종교와 문화의 잠식이 심했던 한반도에서 ‘바리’의 구비전승이야말로 무속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명력의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바리공주’는 오늘의 새로운 현상인 ‘이동’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다시 되풀이되는 전쟁과 갈등의 새 세기에 문화와 종교와 민족과 빈부 차이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어떤 다원적 조화의 가능성을 엿보고 싶었습니다.

냉전 해체 이후 시작된 새로운 세계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주변부 나라들은 국제적인 양극화 속에서 새로운 분쟁과 굶주림에 빠져들었고, 북한은 그들 중 하나입니다. 90년대 중반을 정점으로 북한은 동구권 붕괴 이후 십여년 이상의 오랜 기근 속에서 유엔의 지적에 의하면 삼백여만명이 굶주림과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죽어갔습니다. 풍요로운 남한의 지척에서였지요. 나는 북한 통치권의 책임과 함께 남북의 분단체제를 경영해온 강대국들의 위선적인 인권논리를 여러 차례 비판해왔습니다. 이런 북한의 실상은 비현실적인 ‘북한붕괴 유도’라는 이념적이고 전략적인 논지들에 묻혀 세계 속에서 잊혀지거나 북한정권의 반인도주의적인 면모를 선전하는 데만 활용된 점이 많습니다. 나는 북한 난민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체제의 그늘로 보고 있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주변부는 비슷한 참상을 겪고 있지요.

누구나 환절기의 들판에서 어디론가 멀리 떠나갈 철새들의 무리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새들은 한 무리씩 날아와 비슷한 크기로 자라난 숲의 나뭇가지에 앉거나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전봇대 사이의 긴 전깃줄에 내려와 앉곤 합니다. 그러다가 적당한 간격의 자리들이 가득차게 되었을 때, 보다 큰 무리의 철새들이 날아들면 동요가 일어납니다. 새들은 간격을 좁혀서 옆으로 빈 공간을 내주거나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일단 하늘로 일제히 떠오릅니다. 그들은 새로운 무리와 더불어 허공을 빙빙 돌면서 날다가 어느 맞춤한 순간에 다시 편성을 하여 적당한 간격으로 내려앉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지금의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마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허공을 맴돌고 있는 때’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나의 작업이 ‘새들이 다시 내려앉는 것’에 관여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황석영